\"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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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12-28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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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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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
[ .....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 .......
.....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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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웅기와 나진을 점령한 직후이며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출간된 소련의 국제문제전문지 ‘노보예 브레미야(새로운 시대)’는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조선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만은 결코 반소친미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기도 했다.
●더욱 구체화되는 친소정권 수립 의도
소련군이 청진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향하던 8월 23일 작성된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의 보고서 역시 같은 논지였다. 조선에서 반소적인 정치인들이 영향력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며,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군은 38선을 공식 봉쇄했다.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남북간에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막았다. 9월 6일엔 남북간의 전화와 통신마저 끊었다. 소련군사령부는 “분단이 빚어낸 심각한 경제문제들에 관해 협의하자”는 미군사령부의 제의를 묵살했다. 미군사령부는 거듭 “석탄의 수송과 전기의 공급 및 통화의 조정 등에 관한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제의했지만 허사였다. 이는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분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소련이 비협조적이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9월 12일 런던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계기로 소련의 의도는 한층 노골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처음 열린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의 소련대표단을 위해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이 작성한 ‘조선에 관한 제안’이라는 정책건의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제주도와 대마도까지 넘본 소련의 야심
이 건의서는 약 2년 후 미소(美蘇)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끝난 뒤 부산-진해, 제주도, 인천 등 세 지역을 소련군의 관할 아래 둘 것과 대마도를 조선에 넘겨줄 것을 미국에 요구하라고 제안했다. 만약 첫 번째 제안이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대마도가 조선에 넘어온다면 대마도까지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소련은 동해만 아니라 서해도 지배하게 된다. 나아가 제주도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으므로 그곳을 소련 극동해군의 핵심기지로 만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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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70000000600/3/70070000000600/20040905/8103336/1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④소련은 야심이 없었을까
기사입력 2004-09-05
[ .....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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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들어 그에게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있다고 지탄하는 것은 오해다.
1993년에 공개된 소련측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는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인민군 창군 등 실질적 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분단 고착화의 원흉은 소련이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한 소련의 속셈과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한반도를 포기하려 했던 미국의 속내를 동시에 읽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길은 남한이라도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미국이 아닌 유엔을 떠올렸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로 탄생한 세계에서 드문 신생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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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3.
[ ...... 言論, 出版 및 한국인의 한국내 旅行의 自由에 관한 同意를 측구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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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예비 회담의 합의에 따라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
에서 개최되었다.
蘇聯의 立場은 소련측 수석 대표인 스티코프(T.F. Shtikov) 中將의 共委 開幕 演說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앞으로 수립될 韓國 臨時政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民主的인 政黨과 社會團體를 망라할 토대 위에서 수립될 것이며, 이 정부는 장래 소련에 대한 攻擊 基地가 되지 않을 민주적인 정부, 이를테면 소련에 友好的인 政府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言明했다.53) 이것은 장차 소련이 反共과 反蘇的인 입장을 분명히 하는 남한 내의 右翼勢力의 한반도 지배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意志 表明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미국측 역시 共委에 임하는 나름대로의 기본 전략을 수립하였는데, 이러한 전략은 共委 開幕에 앞서 미국의 合同參謀部(Joint Chiefs of Staff: JCS)가 미국측 대표단에 하달한 다음과 같은 ‘언론·출판·여행의 자유에 관한 지침’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 대표단으로 하여금 곧 개최될 공동위원회의 회기 벽두에 言論, 出版 및 한국인의 한국내 旅行의 自由에 관한 同意를 측구하라고 지시할 것이라는 하아지 장군의 결정이 이 곳에서 승인되었다. 소련측이 초기에 이를 수락하지 않고, 오히려 同委員會를 休會시키려 할 경우 하아지 장군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
1. 언론·출판 및 여행의 자유에 대하여 臨時政府가 기능 수행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최종 결정을 본다는 것으로 將軍의 立場을 留保시킨다.
2. 한국의 민주주의적 政黨 및 社會團體와 협력하기 위하여 위원회의 위원들과 參謀陣이 한국 全域을 여행하기로 한 최초의 협정을 강조한다.
3. 그 후에 임시정부의 구성에 관한 협의를 진행시킨다.54)
여기에서 드러난 共委에서의 미국측 전략은 단적으로 한국인에게 최대한의 언론·출판·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측은 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이며 例外가 있을 수 없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名分을 내세워, 만의 하나 反託 運動을 주도한 정당 및 사회단체가 단순히 反託을 주장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共委와의 협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아울러 북한에 대한 開放 政策을 소련측에 요구함으로써 소련이 북한에 진주한 이후 일관되게 추진한 소비에트化 過程의 實狀을 폭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측 역시 궁극적으로는 좌익 세력의 한반도 지배를 방지한다는 기본 노선 위에서, 共委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인 우익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한다는 자세로 共委에 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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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軍政의 政策과 國內政治狀況
金 雲 泰*
1946.3.6.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
[ ....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 ]
[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
[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가 5일 오전 11시 반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이날 오전 11시 반 대회장에는 남북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이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絞首線을 철폐하라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38선의 철폐에 돌진하려는 결의가 움직이는 가운데 대회의 막이 열리었다.
개회사와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애국가 합창이 성동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함께 있은 후 대회위원장 李允榮(平壤朝鮮民主黨副黨首)으로부터 “38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리의 완전독립은 가망없다. 우리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38선철폐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한다”라는 개회사가 있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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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議文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1) 우리 동포중에는 □□을 기화로 선량한 동포들을 기만 □□하여 政權의 획득을 꾀하는 賣國奴가 있어서 심지어 光輝있는 祖國을 外夷에게 팔아 먹으려는 □□□ 이땅에서 횡행 활보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랴.
38以北을 바라보건대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있어 입으로 民主主義를 표방하면서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후일 政權의 횡탈을 꾀하려 하니 우리 어찌 만연 방관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 3천만 동포는 理論과 표방에 속지 말고 사리와 감정을 떠나서 현실을 엄정 냉정히 관찰하여 정사를 가르고 □□을 판단하여 우리의 추앙 신앙하는 民族의 領導者를 선택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朝鮮의 血統과 民族的 良心을 가진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절대 지지하는 것을 천하에 선명하여 써 內로는 民心의 歸一을 策하며 外로는 이를 萬邦으로 하여금 大韓國民의 完全統一政權으로 승인케 하기를 결의함.
大韓民國 28년 3월 5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 .....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 ]
민주의원 김준연, 38선문제 등 소군정당국 반성 촉구 방송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16일
날짜 1946년 03월 13일
民主議院 金俊淵은 現下의 最緊急한 38선과 농촌문제에 관하여 13일 오후 7시 15분 中央放送局에서 방송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고, 지면관계로 농촌문제는 割愛하고 38선문제만 揭載하여, 美蘇共同委員會를 앞두고 특히 蘇聯軍當局에 반성을 촉구하였다.
“去年 8월 15일 이후 우리 3천만 민중은 37년이란 세월을 고통으로 비참한 死線에서 방황하던 日本의 虐政을 벗어나서 하루바삐 자유독립의 완성을 기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도 아니하던 38도선이 가로 막아 누구나 그 理由와 原因如何를 물론하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南北으로 갈리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생활 전면에 차단을 당하여 왕래의 자유가 없음은 물론 通信의 왕복도 전연 不能한 상태에 있어 벌써 반년을 경과하였으니 이와 같은 우리 民族 相互間의 고통과 비애는 과거 屢千年 역사상에 보지 못하였던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美蘇兩軍이 우리의 自主獨立에 협력하기 위하여 우리 땅에 進駐한 것으로 믿고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큰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京城에서 열린 美蘇共同委員會는 우리 自主獨立의 過渡政權을 수립하는데 협력하는 전제로 38도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그 회답의 내용과 경과의 발표가 있기를 날로 기다리던 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略)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제반행동에 관하여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믿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蘇聯軍의 과오인가 소수 民族反逆者의 죄악인가.
우리는 民衆의 총력을 집결하여 蘇聯軍當局의 반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民族反逆者를 배격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마음과 힘을 모아 死滅에 빠진 38도 以北의 동포를 구해냅시다.
美蘇共同委員會가 또다시 금명중에 회담을 개시하는 모양이니 여기에 대하여서도 우리는 그 경과를 주시하여 우리의 自主獨立完成에 협력하는 것이면 마땅히 滿腔의 성의를 드리고 우리도 심혈을 다하여 목적완성에 奮迅 勇往함은 물론이나 만일 38도선의 철폐를 거부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거나 소위 信託問題 等을 제의하여 우리 民族의 독립을 거부하는 자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 3천만 민족의 사활문제이니 우리가 일심협력하여 끝가지 이것을 반대하지 아니하면 안될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蘇聯軍當局에 대하여 반성을 요구하는 所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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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 ]
1946.3.18.월요일. 동아일보.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심정은 오즉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번 , 미소회담에서 방송파장이 협정되면서부터 라듸오만은 잘들리어 ,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뉴스로서 자위한다고 한다.
* 1947.10.
[ ......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
...... 조선은 결국은 제18소련공화국이 될 것 ........ ]
제목
駐서울UP특파원 스탠리 리취, 북조선의 무력행동 계획 발표
연월일
1947년 10월 25일
출전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10월 26일
駐서울UP특파원 스탠리 리취, 북조선의 무력행동 계획 발표
先月 남조선으로 도망하여 온 한 前北朝鮮관리는 소련에 의하여 훈련 장비된 북조선 군대는 미소 양 점령군의 철퇴와 동시에 조선을 원조코자 행동을 일으키고 조선을 제18소련공화국으로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동 계획은 이미 북조선이 남조선에 보내는 전력을 차단하여 암흑의 엄획하에 행하여질 공격까지도 상정하고 있다 한다.
이 계획은 전 평안남도보안대장 당년 32세의 尹昌善(音譯)에 의하여 발표된 것인데 尹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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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는 ‘미국의 소리’ 방송 외의 조선에 대한 방송을 청취한 까닭으로 남조선 상태가 양호함을 알았다. 이 미국방송은 余가 요직에 있었으므로 청취할 수 있었다.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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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군대는 일본병기로 무장된 것이며 목하 소련은 이들을 위하여 다수의 輕兵器를 齎來중이다. 과거에 있어 소련인은 직접 북조선인을 훈련하고 있는데 그들은 조선은 결국은 제18소련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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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5.12. 獨立戰取國民大會
[ ..... 38의 絞首線問題도 蘇聯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
...... 국제적 公理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蘇聯의 독단을 ....... ]
[ ...... 敵은 우리 墻內에..... 惡質共系의 叛逆言動을 일소하여 民族綱紀의 숙청을 ....... ]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
독립戰取국민대회가 개최
반 만 년의 찬란한 역사와 한 피로 자라온 배달민족의 명예를 피와 땀으로 뭉치고 뭉쳐 우리의 살길을 찾기 위하여 수 개월을 두고 세계공약에 의하여 우리의 자주정부를 수립하여 줄 미소공동위원회의 추이를 고대하고 은인자중하여 오던 애국렬에 불탄 10여 만의 애국시민은 서울동쪽언덕에 운집하여 하늘이 찢어져라 부르짖은 (略)
獨立戰取國民大會는 12일 오후 1시 반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바 대회는 먼저 국기에 경례를 하고 애국가 합창에 이어 선열에 대한 경건한 묵도를 드린 다음 대회 회장인 吳夏英으로부터
“우리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어떤 기쁜소식이 나오지나 않나 하여 매일같이 라디오 신문에 온 신경을 총집중하였던 것이나 오늘날에 접한 소식은 과연 우리를 기쁘게 하였던가. 해방이래 9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바라고 바라던 기쁜소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때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성하고 주먹을 힘있게 쥐어 싸워 나가지 않을 터인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이 중대한 시기를 당하여 우리의 나라를 우리의 손으로 완전자주독립시켜 4천년래 이어받은 혁혁한 역사를 자손만대에 물리지 않을 터인가. 자! 전취하자. 완전자주독립을”
하는 열열한 개회사가 있자 곧 이어 咸尙勳으로부터 미소공동위원회진상보고가 있고 뒤따라 조선민주당 白南弘의 서북조선진상보고가 있었으며, 선언문을 申均이 결의문을 朴永昌이 각각 낭독하였다. 그리고 다음의 순서로 각 단체대표의 결의를 표명하고 동 오후 4시 경에 만세 3창으로 뜻깊은 대회를 마치었다.
◊ 各團體代表 決意表明
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 韓旻洪, 基督敎全國靑年聯合會 姜元龍, 大韓獨立促成愛國婦人會 黃基成, 大韓獨立促成勞動總聯盟 金龜, 大韓獨立農民總聯盟 方致規, 美蘇共同委員會對策全國國民總聯盟 金一, 反託學生總聯盟 李哲承, 大韓獨立促成國民會 李重根, 新朝鮮建設同盟 李康勳, 文學家協會代表, 學生獨立戰線代表
◊ 大會宣言
모 단체 고집으로 인하여 우리의 절실한 요구는 위기를 통하여 흐르는 先代의 긍지를 받들어 깊이 자손만대의 번영을 염원하는 우리는 이에 獨立戰取國民大會를 개최하고 3천만 대중의 이름으로써 밖으로 34隣諸邦의 숙고를 구하고 안으로는 혈족동기의 궐기를 촉하여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國際公約에 의하여 보장된 우리 臨時政府의 수립을 위하여 개최되었던 美蘇共同委員會는 蘇聯의 번복에 의하여 시일을 徒費한채 무기로 정회되었으니 세계의 公眼은 이를 어떻게 보려고 하는가 國土와 國民을 兩斷하고 나아가 國是와 國權을 兩分케 한 38의 絞首線問題도 蘇聯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세계의 公議는 이를 어떻게 논하려 하는가?
자주독립의 이념과 배치되는 신탁관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蘇聯의 權謀와 인류적 특권이오 국제적 公理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蘇聯의 독단을 어디다 문책하며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外力의 제압에 血과 肉이 제물이 되었던 40년 통한을 回憶하고 다시금 外力의 方寸에 形과 體가 左右되려는 현하의 苦境을 직시할 때 우리는 他를 책하여 허물을 3자에게 찾기 보다도 源由를 자신에게 살피어 內省할 필요를 느끼나니 究其本源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보라! 來寇보다도 敵은 우리 墻內에 있고 外傷보다도 菌은 우리 體內에 있으니 시공이 자별한 민족적 독자성을 무시하는 叛逆徒黨의 존재가 그것이며 他方에 追尾하여 外侮를 誘致한 惡質共系의 언동이 그것이다. 민족적 자아의 존엄을 모독하여 受託의 妄論을 공언하고 민족적 巨役인 광복의 전야에 처하여 분쟁을 시사하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없다 할진대 무엇인들 못참을 것이랴?
실리만을 취하여 互全에 苟安함이 본래 우리의 義가 아니오, 명분만을 위하여 玉碎로 나감도 우리의 策이 아니나 그러나 民族正氣의 주축은 부동이라 行坐進退의 한계가 자재하여 자율정체의 주권과 독립국가의 면목을 고수할 背水陳頭의 일선이 있으니 이는 곧 우리의 생명이다.
이를 世界에 명시하여 輿論을 수긍케 할 자가 누구이며 이를 永劫에 護持하여 만민을 일관케 할 힘이 무엇인가! 오직 自我요 오직 自力이다. 自尊·自持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 있고 自立·自行의 진로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自助·自勉의 방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지 전능을 이 일점에 응결시키고 총의 총력을 이 일선에 集注시키어 解放朝鮮을 거룩하게 하고 光復朝鮮을 빛나게 하자. 이에 5개 조의 결의를 들어 3천만 겨레의 심장에 격한다.
獨立戰取國民大會
決意5箇條
1) 美蘇共同委員會의 책임을 규명하여 국제여론의 심판을 구함
2) 自主政府의 자율적 수립을 촉진하여 民意의 歸一을 기함
3) 38장벽의 철폐를 목표로 國民動員의 실적을 擧함
4) 惡質共系의 叛逆言動을 일소하여 民族綱紀의 숙청을 圖함
5) 友邦善隣의 협력하에 경제건설의 매진을 요함
大韓民國 28년 5월 12일
獨立戰取國民大會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
\" 분단책임 ? 중공한테 물어라 \"
조갑제 2005년 11월 5일
1988년에 기자는 月刊朝鮮에 싣기 위해 용산미군기지를 최재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만났던 미군관계자의 말을 지금 다시 읽어보니 똑 같은 쟁점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익명을 요구한 이 관계자는 최근에 미군범죄자에 대한 한국측의 재판권을 둘러싸고 비판적 기사가 언론에 자주 나오는 데 대하여 몹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미간의 행정협정은 美日간의 행정협정과 거의 같다. 美日간의 협정문에서 JAPAN이란 낱말을 KOREA로 바꾸기만 하면 그대로 통용될 정도다. 이 협정이 발표된 뒤 한번도 한국정부가 개정을 요구해 온 적이 없다는 것은 이 협정이 절대로 다른 나라에 비해서 불평등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미군 자체내의 재판결과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여기 우리가 달마다 한국정부에 보고하는 처리 결과보고서가 있지 않은가. 지난 봄 동두천에서 칼을 꺼내 한국인을 위협했던 상병은 군법회의에 넘겨져 일병으로 강등시키고 예편시킴과 동시에 1년 징역에 3천6백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대구에서 다투다가 한국인 가옥의 지붕을 부순 미군 일병은 2등병으로 강등되었고 외출금지 14일 초과근무 14일의 처벌을 받았다. 물건을 암시장에 판 한 사병은 1계급 강등, 두 달간 초과근무, 4백17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우리 군사법정의 형량이 한국법원에 비해서 결코 낮지 않다. 실제로 많은 미군인들은 차라리 한국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면 하고 있다』
한 미군 고위관리는 최근의 反美감정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하기도 했다.
『우리보고 분단의 책임을 지라고 하는데 1950년에 우리는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한국의 재통일을 거의 완수했었다. 그때 중공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한반도 통일의 공로자가 되었을 것이다. 분단의 책임을 제대로 물으려면 중공한테 물어라. 한국인의 反美의식은 미국을 한국의 큰형으로 생각하고, 큰형은 동생을 무조건 감싸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기대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미국이 한국에 시장개방압력을 넣으면 그것은 큰형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반미로 흐르고 있다.
6·25에 미군이 개입한 것을 미국이익의 수호라는 관점에서만 보지 말라. 트루만 대통령의 파병결정에는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라는 휴머니즘적인 요인이 더 강했다고 본다. 한국인들은 자꾸만 이해관계로써만 미국의 행동을 분석하려 하는데 미국이란 나라는 신념과 이상을 위해서도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다』
http://www.chogabje.com/board/board_read.asp?tablename=choboard&idx=8271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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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
[ .....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 .......
.....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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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웅기와 나진을 점령한 직후이며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출간된 소련의 국제문제전문지 ‘노보예 브레미야(새로운 시대)’는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조선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만은 결코 반소친미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기도 했다.
●더욱 구체화되는 친소정권 수립 의도
소련군이 청진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향하던 8월 23일 작성된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의 보고서 역시 같은 논지였다. 조선에서 반소적인 정치인들이 영향력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며,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군은 38선을 공식 봉쇄했다.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남북간에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막았다. 9월 6일엔 남북간의 전화와 통신마저 끊었다. 소련군사령부는 “분단이 빚어낸 심각한 경제문제들에 관해 협의하자”는 미군사령부의 제의를 묵살했다. 미군사령부는 거듭 “석탄의 수송과 전기의 공급 및 통화의 조정 등에 관한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제의했지만 허사였다. 이는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분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소련이 비협조적이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9월 12일 런던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계기로 소련의 의도는 한층 노골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처음 열린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의 소련대표단을 위해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이 작성한 ‘조선에 관한 제안’이라는 정책건의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제주도와 대마도까지 넘본 소련의 야심
이 건의서는 약 2년 후 미소(美蘇)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끝난 뒤 부산-진해, 제주도, 인천 등 세 지역을 소련군의 관할 아래 둘 것과 대마도를 조선에 넘겨줄 것을 미국에 요구하라고 제안했다. 만약 첫 번째 제안이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대마도가 조선에 넘어온다면 대마도까지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소련은 동해만 아니라 서해도 지배하게 된다. 나아가 제주도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으므로 그곳을 소련 극동해군의 핵심기지로 만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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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70000000600/3/70070000000600/20040905/8103336/1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④소련은 야심이 없었을까
기사입력 2004-09-05
[ .....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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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들어 그에게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있다고 지탄하는 것은 오해다.
1993년에 공개된 소련측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는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인민군 창군 등 실질적 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분단 고착화의 원흉은 소련이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한 소련의 속셈과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한반도를 포기하려 했던 미국의 속내를 동시에 읽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길은 남한이라도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미국이 아닌 유엔을 떠올렸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로 탄생한 세계에서 드문 신생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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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3.
[ ...... 言論, 出版 및 한국인의 한국내 旅行의 自由에 관한 同意를 측구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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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예비 회담의 합의에 따라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
에서 개최되었다.
蘇聯의 立場은 소련측 수석 대표인 스티코프(T.F. Shtikov) 中將의 共委 開幕 演說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앞으로 수립될 韓國 臨時政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民主的인 政黨과 社會團體를 망라할 토대 위에서 수립될 것이며, 이 정부는 장래 소련에 대한 攻擊 基地가 되지 않을 민주적인 정부, 이를테면 소련에 友好的인 政府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言明했다.53) 이것은 장차 소련이 反共과 反蘇的인 입장을 분명히 하는 남한 내의 右翼勢力의 한반도 지배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意志 表明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미국측 역시 共委에 임하는 나름대로의 기본 전략을 수립하였는데, 이러한 전략은 共委 開幕에 앞서 미국의 合同參謀部(Joint Chiefs of Staff: JCS)가 미국측 대표단에 하달한 다음과 같은 ‘언론·출판·여행의 자유에 관한 지침’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 대표단으로 하여금 곧 개최될 공동위원회의 회기 벽두에 言論, 出版 및 한국인의 한국내 旅行의 自由에 관한 同意를 측구하라고 지시할 것이라는 하아지 장군의 결정이 이 곳에서 승인되었다. 소련측이 초기에 이를 수락하지 않고, 오히려 同委員會를 休會시키려 할 경우 하아지 장군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
1. 언론·출판 및 여행의 자유에 대하여 臨時政府가 기능 수행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최종 결정을 본다는 것으로 將軍의 立場을 留保시킨다.
2. 한국의 민주주의적 政黨 및 社會團體와 협력하기 위하여 위원회의 위원들과 參謀陣이 한국 全域을 여행하기로 한 최초의 협정을 강조한다.
3. 그 후에 임시정부의 구성에 관한 협의를 진행시킨다.54)
여기에서 드러난 共委에서의 미국측 전략은 단적으로 한국인에게 최대한의 언론·출판·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측은 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이며 例外가 있을 수 없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名分을 내세워, 만의 하나 反託 運動을 주도한 정당 및 사회단체가 단순히 反託을 주장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共委와의 협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아울러 북한에 대한 開放 政策을 소련측에 요구함으로써 소련이 북한에 진주한 이후 일관되게 추진한 소비에트化 過程의 實狀을 폭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측 역시 궁극적으로는 좌익 세력의 한반도 지배를 방지한다는 기본 노선 위에서, 共委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인 우익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한다는 자세로 共委에 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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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軍政의 政策과 國內政治狀況
金 雲 泰*
1946.3.6. 38선 철폐요구 국민대회
[ ....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 ]
[ ....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 ]
[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
38선철폐요구 국민대회 개최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가 5일 오전 11시 반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38선철폐요구국민대회에 군중이 들고 나선 기치와 표어는 다음과 같다.
38絞首線 撤廢
38以北의 農民의 食糧을 약탈 말라
生地獄 38以北의 同胞를 살리자
自主獨立의 전제조건이다
38以北의 機械없는 공장의 노동자를 살리자
38以北의 言論·集會·結社의 자유를 다오
言論機關은 반성하라 38以北의 진상을 정확히 報道하라
民族의 總意로 38線 撤廢를 요구하자
이날 오전 11시 반 대회장에는 남북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이 ‘건국의 장애물인 38선을 철폐하라’ 38絞首線을 철폐하라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국민의 총의를 무시한 38선의 철폐에 돌진하려는 결의가 움직이는 가운데 대회의 막이 열리었다.
개회사와 국기게양이 끝난 다음 애국가 합창이 성동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함께 있은 후 대회위원장 李允榮(平壤朝鮮民主黨副黨首)으로부터 “38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 우리의 완전독립은 가망없다. 우리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38선철폐 국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한다”라는 개회사가 있었다.
그 다음 임시정부 외교부장 趙素昻으로부터 李承晩, 金九의 축사를 대독한 후 서북선의 실정보고에 들어가 宋義淳, 崔奎恒, 白凡石 3인의 보고연설에 이어 다음과 같은 決議文 낭독이 있은 후 독립만세 삼창으로서 의의깊은 대회의 막을 닫고 동 오후 2시에 폐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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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議文
1) 朝鮮의 38도선은 外敵이 항복하기 전 聯合軍參謀總長會議에서 작전상의 필요로 획정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금일의 朝鮮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치 아니한다.
이 후도 美蘇兩軍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주둔하여 현재와 같은 3천만 민족의 統一團結과 自主國家 건설에 지장이 클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파멸을 초래하여 國民生活을 도탄에 빠지게 하며 政治·經濟 文化·交通·通信·居住의 자유를 拘?하는 바 큼으로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써 聯合軍과 聯合軍總司令官 及 美蘇共同委員會에 대하여 38선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여 其 목적의 관철을 기하기를 결의함.
1) 우리 동포중에는 □□을 기화로 선량한 동포들을 기만 □□하여 政權의 획득을 꾀하는 賣國奴가 있어서 심지어 光輝있는 祖國을 外夷에게 팔아 먹으려는 □□□ 이땅에서 횡행 활보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랴.
38以北을 바라보건대 진정한 民意를 무시하고 소수인원의 恣意로 된 臨時人民委員會가 있어 입으로 民主主義를 표방하면서 민중을 억압 기만하여 후일 政權의 횡탈을 꾀하려 하니 우리 어찌 만연 방관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 3천만 동포는 理論과 표방에 속지 말고 사리와 감정을 떠나서 현실을 엄정 냉정히 관찰하여 정사를 가르고 □□을 판단하여 우리의 추앙 신앙하는 民族의 領導者를 선택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朝鮮의 血統과 民族的 良心을 가진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을 절대 지지하는 것을 천하에 선명하여 써 內로는 民心의 歸一을 策하며 外로는 이를 萬邦으로 하여금 大韓國民의 完全統一政權으로 승인케 하기를 결의함.
大韓民國 28년 3월 5일
38線撤廢要求國民大會
동아일보 1946년 03월 06일
[ .....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 ]
민주의원 김준연, 38선문제 등 소군정당국 반성 촉구 방송
게재지명 동아일보
게재일자 1946년 03월 16일
날짜 1946년 03월 13일
民主議院 金俊淵은 現下의 最緊急한 38선과 농촌문제에 관하여 13일 오후 7시 15분 中央放送局에서 방송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고, 지면관계로 농촌문제는 割愛하고 38선문제만 揭載하여, 美蘇共同委員會를 앞두고 특히 蘇聯軍當局에 반성을 촉구하였다.
“去年 8월 15일 이후 우리 3천만 민중은 37년이란 세월을 고통으로 비참한 死線에서 방황하던 日本의 虐政을 벗어나서 하루바삐 자유독립의 완성을 기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도 아니하던 38도선이 가로 막아 누구나 그 理由와 原因如何를 물론하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南北으로 갈리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생활 전면에 차단을 당하여 왕래의 자유가 없음은 물론 通信의 왕복도 전연 不能한 상태에 있어 벌써 반년을 경과하였으니 이와 같은 우리 民族 相互間의 고통과 비애는 과거 屢千年 역사상에 보지 못하였던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美蘇兩軍이 우리의 自主獨立에 협력하기 위하여 우리 땅에 進駐한 것으로 믿고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큰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京城에서 열린 美蘇共同委員會는 우리 自主獨立의 過渡政權을 수립하는데 협력하는 전제로 38도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하는데 대하여 그 회답의 내용과 경과의 발표가 있기를 날로 기다리던 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略) 協定된 것도 蘇聯軍司令官의 거부로 성립되지 아니하였으니 蘇聯軍의 心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제반행동에 관하여 38도 以北의 우리 동포는 무한한 모욕과 각종의 학대를 받아 파멸상태에 빠졌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믿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蘇聯軍의 과오인가 소수 民族反逆者의 죄악인가.
우리는 民衆의 총력을 집결하여 蘇聯軍當局의 반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民族反逆者를 배격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마음과 힘을 모아 死滅에 빠진 38도 以北의 동포를 구해냅시다.
美蘇共同委員會가 또다시 금명중에 회담을 개시하는 모양이니 여기에 대하여서도 우리는 그 경과를 주시하여 우리의 自主獨立完成에 협력하는 것이면 마땅히 滿腔의 성의를 드리고 우리도 심혈을 다하여 목적완성에 奮迅 勇往함은 물론이나 만일 38도선의 철폐를 거부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거나 소위 信託問題 等을 제의하여 우리 民族의 독립을 거부하는 자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 3천만 민족의 사활문제이니 우리가 일심협력하여 끝가지 이것을 반대하지 아니하면 안될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蘇聯軍當局에 대하여 반성을 요구하는 所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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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 ]
1946.3.18.월요일. 동아일보.
\" 라듸오\"로 듯는 이남의 소식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잇스나 38이남의 소식을 전혀 드를 길이 업는 이북 사람들의 심정은 오즉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번 , 미소회담에서 방송파장이 협정되면서부터 라듸오만은 잘들리어 , 서울중앙방송국으로부터 보내는 뉴스로서 자위한다고 한다.
* 1947.10.
[ ......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
...... 조선은 결국은 제18소련공화국이 될 것 ........ ]
제목
駐서울UP특파원 스탠리 리취, 북조선의 무력행동 계획 발표
연월일
1947년 10월 25일
출전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10월 26일
駐서울UP특파원 스탠리 리취, 북조선의 무력행동 계획 발표
先月 남조선으로 도망하여 온 한 前北朝鮮관리는 소련에 의하여 훈련 장비된 북조선 군대는 미소 양 점령군의 철퇴와 동시에 조선을 원조코자 행동을 일으키고 조선을 제18소련공화국으로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동 계획은 이미 북조선이 남조선에 보내는 전력을 차단하여 암흑의 엄획하에 행하여질 공격까지도 상정하고 있다 한다.
이 계획은 전 평안남도보안대장 당년 32세의 尹昌善(音譯)에 의하여 발표된 것인데 尹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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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는 ‘미국의 소리’ 방송 외의 조선에 대한 방송을 청취한 까닭으로 남조선 상태가 양호함을 알았다. 이 미국방송은 余가 요직에 있었으므로 청취할 수 있었다. 평양방송 이외의 방송을 청취하는데 대한 처벌은 재산몰수 급 6개월 징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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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군대는 일본병기로 무장된 것이며 목하 소련은 이들을 위하여 다수의 輕兵器를 齎來중이다. 과거에 있어 소련인은 직접 북조선인을 훈련하고 있는데 그들은 조선은 결국은 제18소련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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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5.12. 獨立戰取國民大會
[ ..... 38의 絞首線問題도 蘇聯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
...... 국제적 公理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蘇聯의 독단을 ....... ]
[ ...... 敵은 우리 墻內에..... 惡質共系의 叛逆言動을 일소하여 民族綱紀의 숙청을 ....... ]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
독립戰取국민대회가 개최
반 만 년의 찬란한 역사와 한 피로 자라온 배달민족의 명예를 피와 땀으로 뭉치고 뭉쳐 우리의 살길을 찾기 위하여 수 개월을 두고 세계공약에 의하여 우리의 자주정부를 수립하여 줄 미소공동위원회의 추이를 고대하고 은인자중하여 오던 애국렬에 불탄 10여 만의 애국시민은 서울동쪽언덕에 운집하여 하늘이 찢어져라 부르짖은 (略)
獨立戰取國民大會는 12일 오후 1시 반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바 대회는 먼저 국기에 경례를 하고 애국가 합창에 이어 선열에 대한 경건한 묵도를 드린 다음 대회 회장인 吳夏英으로부터
“우리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어떤 기쁜소식이 나오지나 않나 하여 매일같이 라디오 신문에 온 신경을 총집중하였던 것이나 오늘날에 접한 소식은 과연 우리를 기쁘게 하였던가. 해방이래 9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바라고 바라던 기쁜소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때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성하고 주먹을 힘있게 쥐어 싸워 나가지 않을 터인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이 중대한 시기를 당하여 우리의 나라를 우리의 손으로 완전자주독립시켜 4천년래 이어받은 혁혁한 역사를 자손만대에 물리지 않을 터인가. 자! 전취하자. 완전자주독립을”
하는 열열한 개회사가 있자 곧 이어 咸尙勳으로부터 미소공동위원회진상보고가 있고 뒤따라 조선민주당 白南弘의 서북조선진상보고가 있었으며, 선언문을 申均이 결의문을 朴永昌이 각각 낭독하였다. 그리고 다음의 순서로 각 단체대표의 결의를 표명하고 동 오후 4시 경에 만세 3창으로 뜻깊은 대회를 마치었다.
◊ 各團體代表 決意表明
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 韓旻洪, 基督敎全國靑年聯合會 姜元龍, 大韓獨立促成愛國婦人會 黃基成, 大韓獨立促成勞動總聯盟 金龜, 大韓獨立農民總聯盟 方致規, 美蘇共同委員會對策全國國民總聯盟 金一, 反託學生總聯盟 李哲承, 大韓獨立促成國民會 李重根, 新朝鮮建設同盟 李康勳, 文學家協會代表, 學生獨立戰線代表
◊ 大會宣言
모 단체 고집으로 인하여 우리의 절실한 요구는 위기를 통하여 흐르는 先代의 긍지를 받들어 깊이 자손만대의 번영을 염원하는 우리는 이에 獨立戰取國民大會를 개최하고 3천만 대중의 이름으로써 밖으로 34隣諸邦의 숙고를 구하고 안으로는 혈족동기의 궐기를 촉하여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國際公約에 의하여 보장된 우리 臨時政府의 수립을 위하여 개최되었던 美蘇共同委員會는 蘇聯의 번복에 의하여 시일을 徒費한채 무기로 정회되었으니 세계의 公眼은 이를 어떻게 보려고 하는가 國土와 國民을 兩斷하고 나아가 國是와 國權을 兩分케 한 38의 絞首線問題도 蘇聯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세계의 公議는 이를 어떻게 논하려 하는가?
자주독립의 이념과 배치되는 신탁관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蘇聯의 權謀와 인류적 특권이오 국제적 公理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蘇聯의 독단을 어디다 문책하며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外力의 제압에 血과 肉이 제물이 되었던 40년 통한을 回憶하고 다시금 外力의 方寸에 形과 體가 左右되려는 현하의 苦境을 직시할 때 우리는 他를 책하여 허물을 3자에게 찾기 보다도 源由를 자신에게 살피어 內省할 필요를 느끼나니 究其本源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보라! 來寇보다도 敵은 우리 墻內에 있고 外傷보다도 菌은 우리 體內에 있으니 시공이 자별한 민족적 독자성을 무시하는 叛逆徒黨의 존재가 그것이며 他方에 追尾하여 外侮를 誘致한 惡質共系의 언동이 그것이다. 민족적 자아의 존엄을 모독하여 受託의 妄論을 공언하고 민족적 巨役인 광복의 전야에 처하여 분쟁을 시사하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없다 할진대 무엇인들 못참을 것이랴?
실리만을 취하여 互全에 苟安함이 본래 우리의 義가 아니오, 명분만을 위하여 玉碎로 나감도 우리의 策이 아니나 그러나 民族正氣의 주축은 부동이라 行坐進退의 한계가 자재하여 자율정체의 주권과 독립국가의 면목을 고수할 背水陳頭의 일선이 있으니 이는 곧 우리의 생명이다.
이를 世界에 명시하여 輿論을 수긍케 할 자가 누구이며 이를 永劫에 護持하여 만민을 일관케 할 힘이 무엇인가! 오직 自我요 오직 自力이다. 自尊·自持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 있고 自立·自行의 진로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自助·自勉의 방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지 전능을 이 일점에 응결시키고 총의 총력을 이 일선에 集注시키어 解放朝鮮을 거룩하게 하고 光復朝鮮을 빛나게 하자. 이에 5개 조의 결의를 들어 3천만 겨레의 심장에 격한다.
獨立戰取國民大會
決意5箇條
1) 美蘇共同委員會의 책임을 규명하여 국제여론의 심판을 구함
2) 自主政府의 자율적 수립을 촉진하여 民意의 歸一을 기함
3) 38장벽의 철폐를 목표로 國民動員의 실적을 擧함
4) 惡質共系의 叛逆言動을 일소하여 民族綱紀의 숙청을 圖함
5) 友邦善隣의 협력하에 경제건설의 매진을 요함
大韓民國 28년 5월 12일
獨立戰取國民大會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
\" 분단책임 ? 중공한테 물어라 \"
조갑제 2005년 11월 5일
1988년에 기자는 月刊朝鮮에 싣기 위해 용산미군기지를 최재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만났던 미군관계자의 말을 지금 다시 읽어보니 똑 같은 쟁점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익명을 요구한 이 관계자는 최근에 미군범죄자에 대한 한국측의 재판권을 둘러싸고 비판적 기사가 언론에 자주 나오는 데 대하여 몹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미간의 행정협정은 美日간의 행정협정과 거의 같다. 美日간의 협정문에서 JAPAN이란 낱말을 KOREA로 바꾸기만 하면 그대로 통용될 정도다. 이 협정이 발표된 뒤 한번도 한국정부가 개정을 요구해 온 적이 없다는 것은 이 협정이 절대로 다른 나라에 비해서 불평등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미군 자체내의 재판결과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여기 우리가 달마다 한국정부에 보고하는 처리 결과보고서가 있지 않은가. 지난 봄 동두천에서 칼을 꺼내 한국인을 위협했던 상병은 군법회의에 넘겨져 일병으로 강등시키고 예편시킴과 동시에 1년 징역에 3천6백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대구에서 다투다가 한국인 가옥의 지붕을 부순 미군 일병은 2등병으로 강등되었고 외출금지 14일 초과근무 14일의 처벌을 받았다. 물건을 암시장에 판 한 사병은 1계급 강등, 두 달간 초과근무, 4백17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우리 군사법정의 형량이 한국법원에 비해서 결코 낮지 않다. 실제로 많은 미군인들은 차라리 한국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면 하고 있다』
한 미군 고위관리는 최근의 反美감정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하기도 했다.
『우리보고 분단의 책임을 지라고 하는데 1950년에 우리는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한국의 재통일을 거의 완수했었다. 그때 중공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한반도 통일의 공로자가 되었을 것이다. 분단의 책임을 제대로 물으려면 중공한테 물어라. 한국인의 反美의식은 미국을 한국의 큰형으로 생각하고, 큰형은 동생을 무조건 감싸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기대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미국이 한국에 시장개방압력을 넣으면 그것은 큰형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반미로 흐르고 있다.
6·25에 미군이 개입한 것을 미국이익의 수호라는 관점에서만 보지 말라. 트루만 대통령의 파병결정에는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라는 휴머니즘적인 요인이 더 강했다고 본다. 한국인들은 자꾸만 이해관계로써만 미국의 행동을 분석하려 하는데 미국이란 나라는 신념과 이상을 위해서도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다』
http://www.chogabje.com/board/board_read.asp?tablename=choboard&idx=8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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