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5. 3대 민의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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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공독재
작성일 18-12-28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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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8. 정,부통령선거
[ ....... 유효표 74.6% ...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 .......
...... 민국당은 ...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
...... 조봉암 ...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 10% 내외 ........ ]
1954.5. 3대 민의원선거
[ ......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 ........
..... 민국당은 .... 불과 15명만 당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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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4.5월에 실시된 지방의회선거는 정당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기초의회(시,읍,면의회)의 경우 17,559석 중 무소속이 42.5%인 7,469석을 차지하여 자유당의 4,444석이나 야당세력인 대한청년단 2,843석, 국민회 2,621석 보다 다수였다. 그러나 광역의회(특별시,도의회)의 경우 선거 직전에 족청의 이범석이 내무장관에 임명됨으로써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 경찰의 지원까지 받았던 자유당이 306석 중 147석을 차지하여 무소속 85석이나 한청 34석, 국민회 32석 보다 월등히 많은 당선자를 냈다. 기초든 광역이든 정당조직으로는 자유당세력이 지방의회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고 그렇게 구성된 지방의회는 지방주민을 동원하여 직선개헌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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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경찰과 계엄군을 동원한 가택수색이 시작되고 심지어 구속중인 의원들도 보석출감하여 국회에 호송되었다. 이리하여 7월 4일 경찰과 청년단에 의해 포위된 의사당에서 기립투표 끝에 마침내 찬성 163, 반대 0, 기권 3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 되었다.
직선제 개헌을 위해 이와 같은 무리수를 동원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52년 8월 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 유효표 74.6%에 해당되는 5,238,769만 표를 얻어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경찰,관료,그리고 자유당 조직이 총동원된 선거였기도 했지만 전쟁 중의 국민들로서는 이승만 외에 마땅한 대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국당은 이승만에 대항하여 후보를 내세운다는 것은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초대 농림장관을 지낸 조봉암과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각각 797,504표,764,715표를 얻어 10% 내외의 득표율을 보였다. 한편 부통령에는 자유당내 족청계의 지지로 후보에 나섰던 이범석을 제치고 이승만이 지지한 무소속의 함태영이 유효표의 41.3%인 2,943,813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원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족청계가 장악하고 있었던 자유당은 52년 7월 전당 대회를 개최하고 정,부통령후보에 이승만,이범석을 각각 공천하였다. 그러나 개헌성공 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로 강력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함으로써 자유당을 확실한 친정체제로 전환시키고 싶었던 이승만은 전당대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부통령에 무소속의 함태영을 지지하고 정,부당수제를 총재제로 바꿀 것을 요구하여 잠재적 경쟁자인 부당수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이범석과 경쟁관계에 있던 장택상총리는 전국의 지방행정조직 및 경찰조직을 동원하여 함태영을 당선시켰는데 이것은 족청의 조직력이라 하더라도 경찰,관료의 뒷받침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는 당시 정치의 한계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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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등의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2대 직선대통령 선거와 그 뒤를 이은 휴전반대운동 및 반공포로 석방 등에서 국민들의 동원이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선거사상 처음으로 정당공천 후보제를 실시했던 1954년 5월 20일 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물론 관료와 경찰의 선거개입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였으나 이승만의 권위에 도전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하고 이기붕을 중심으로 확실한 이승만의 친정체제를 확립한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을 차지하였다.
반면 민국당은 개헌파동 후 현저한 세력 약화 속에서 자유당의 족칭계 제거기를 이용하여 1953년 11월 혁신강화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소장파를 책임부서에 등용하는 등 당세 만회에 노력하였으나 3대 총선에서 불과 15명만 당선됨으로써 원내교섭단체도 구성치 못하게 되었다. 또한 1,2대 국회선거에서 압도적 다수가 당선되었던 무소속 제도의 변화와 자유당의 압승에 따라 67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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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7.27. 휴전협정
[ ....... 유효표 74.6% ...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 .......
...... 민국당은 ...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
...... 조봉암 ...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 10% 내외 ........ ]
1954.5. 3대 민의원선거
[ ......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 ........
..... 민국당은 .... 불과 15명만 당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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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4.5월에 실시된 지방의회선거는 정당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기초의회(시,읍,면의회)의 경우 17,559석 중 무소속이 42.5%인 7,469석을 차지하여 자유당의 4,444석이나 야당세력인 대한청년단 2,843석, 국민회 2,621석 보다 다수였다. 그러나 광역의회(특별시,도의회)의 경우 선거 직전에 족청의 이범석이 내무장관에 임명됨으로써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 경찰의 지원까지 받았던 자유당이 306석 중 147석을 차지하여 무소속 85석이나 한청 34석, 국민회 32석 보다 월등히 많은 당선자를 냈다. 기초든 광역이든 정당조직으로는 자유당세력이 지방의회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고 그렇게 구성된 지방의회는 지방주민을 동원하여 직선개헌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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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경찰과 계엄군을 동원한 가택수색이 시작되고 심지어 구속중인 의원들도 보석출감하여 국회에 호송되었다. 이리하여 7월 4일 경찰과 청년단에 의해 포위된 의사당에서 기립투표 끝에 마침내 찬성 163, 반대 0, 기권 3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 되었다.
직선제 개헌을 위해 이와 같은 무리수를 동원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52년 8월 5일의 정,부통령선거에서 유효표 74.6%에 해당되는 5,238,769만 표를 얻어 압도적 지지로 쉽게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경찰,관료,그리고 자유당 조직이 총동원된 선거였기도 했지만 전쟁 중의 국민들로서는 이승만 외에 마땅한 대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국당은 이승만에 대항하여 후보를 내세운다는 것은 정치자금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고 초대 농림장관을 지낸 조봉암과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각각 797,504표,764,715표를 얻어 10% 내외의 득표율을 보였다. 한편 부통령에는 자유당내 족청계의 지지로 후보에 나섰던 이범석을 제치고 이승만이 지지한 무소속의 함태영이 유효표의 41.3%인 2,943,813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원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족청계가 장악하고 있었던 자유당은 52년 7월 전당 대회를 개최하고 정,부통령후보에 이승만,이범석을 각각 공천하였다. 그러나 개헌성공 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로 강력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함으로써 자유당을 확실한 친정체제로 전환시키고 싶었던 이승만은 전당대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부통령에 무소속의 함태영을 지지하고 정,부당수제를 총재제로 바꿀 것을 요구하여 잠재적 경쟁자인 부당수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이범석과 경쟁관계에 있던 장택상총리는 전국의 지방행정조직 및 경찰조직을 동원하여 함태영을 당선시켰는데 이것은 족청의 조직력이라 하더라도 경찰,관료의 뒷받침 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는 당시 정치의 한계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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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등의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2대 직선대통령 선거와 그 뒤를 이은 휴전반대운동 및 반공포로 석방 등에서 국민들의 동원이나 지지를 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선거사상 처음으로 정당공천 후보제를 실시했던 1954년 5월 20일 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물론 관료와 경찰의 선거개입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였으나 이승만의 권위에 도전했던 이범석과 족청계를 숙청하고 이기붕을 중심으로 확실한 이승만의 친정체제를 확립한 자유당이 재석 203석 중 과반수가 넘는 114석을 차지하였다.
반면 민국당은 개헌파동 후 현저한 세력 약화 속에서 자유당의 족칭계 제거기를 이용하여 1953년 11월 혁신강화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단일지도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소장파를 책임부서에 등용하는 등 당세 만회에 노력하였으나 3대 총선에서 불과 15명만 당선됨으로써 원내교섭단체도 구성치 못하게 되었다. 또한 1,2대 국회선거에서 압도적 다수가 당선되었던 무소속 제도의 변화와 자유당의 압승에 따라 67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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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7.27. 휴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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